국보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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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설명-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초상화이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평생 주자학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그는 논리적이고 힘있는 문장과 서예로도 평판이 높았다.
이 초상화는 세로 89.7cm, 가로 67.6cm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그리고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에서는 학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이 초상화의 오른쪽 위에는 송시열이 1651년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지은 글이 해서체로 쓰여 있으며, 중앙 위쪽에는 숙종이 1707년 정몽주의 초상화에 헌정한 어제시가 예서체로 쓰여 있는데 ‘정묘조’라는 기록이 함께 보인다. 그러나 위의 두 기록은 화면 위에 기록된 시기가 확실하지 않고, 서로 시차도 있어서 이 작품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간결한 옷주름의 표현, 얼굴과 복식에 음영이 사용되지 않은 점 등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이 보이므로 17세기로 제작시기를 특정하기도 하지만, 후자의 기록을 근거로 17세기 초상화를 잘 모사한 18세기 후기 이후의 이모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국 각지에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곳에 봉안하기 위해 많은 이모본들이 제작되었고 그 가운데 다수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초상화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대표작으로 조선시대 유학자 초상의 면모와 특징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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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설명-
‘송시열 초상’은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초상화로, 제천의 황강영당(黃江影堂)에 300년 넘게 봉안되어 온 내력이 분명한 작품이다.
송시열은 고위직을 지냈음에도 화면 속 그는 관료의 모습이 아닌 사방건(四方巾, 네모난 형태의 모자)을 쓰고 심의(深衣, 유학자의 평상복)를 입은 청정한 유학자로 표현되었다. 작품 상단에는 “우암 송선생 칠십사세진(尤庵宋先生七十四歲眞)”라는 화제가 전서로 적혀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송시열의 초상을 문인화가 김창업(金昌業)이 그렸음을 밝힌 김창협의 화상찬(畵像讚)이 해서로 적혀 있다. 화면 왼쪽에는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짓고 권상하의 제자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이 필사한 화상찬이 해서로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이 1680년 23세의 김창업이 74세의 송시열을 그린 초본을 저본으로 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은 족자형태로 장황되었고 이음새 없는 한 장의 비단을 화면으로 사용하였다. 네모난 회색 사방건을 쓰고 검은색으로 깃과 소맷부리의 가장자리를 두른 회색 심의를 입은 채, 두 손을 맞잡아 소매 속에 넣은 반신상을 묘사하였다. 송시열의 굴곡진 삶을 대변하듯 희끗희끗한 콧수염과 턱수염, 구레나룻에 이마와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이 인상적이다.
희고 검은 긴 수염은 세밀하게 표현한 반면 눈썹은 검고 짙게 그렸고, 황갈색으로 주름과 음영을 표현한 얼굴의 상세한 묘사와 달리 의복은 짙은 먹 선 위주로 굵고 간략하게 그리는 등 서로 대비되는 필치는 송시열의 용모와 기상, 품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송시열은 후대에도 추앙이 지속되면서 약 30점의 많은 초상화가 전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김창업이 그린 초본을 저본(底本)으로 한 점과 진재해(奏再奚, 1691∼1769) 등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우수한 사례에 속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