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현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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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연 대 : 1689년(숙종 15)
유 형 : 비문
크 기 : 전체높이 252.0 비신높이 147.0 너비 81.0 두께 30.0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화당리 산2-8
서 체 : 해서(楷書)
찬자 /각자 /서자 : 송시열(宋時烈) / 미상 / 김수증(金壽增)
이 비는 1689년에 건립된 삼현여비(三賢閭碑)로 송구수, 송인수 형제와 이들의 매제인 성재원의 학문과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송구수의 본관은 은진, 호는 서준이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성품이 온화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묘앞에다 집을 짓고 묘를 지키고 있는데 흰제비가 날아와서 집을 지었다고 할 정도로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벼슬은 봉사에 이르렀다. 송인수의 자는 미수, 호는 규암으로 연산군 5년(1499년)에 회덕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겨 널리 경사를 연구하고 중종 17년(152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학문과 도덕은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되었으며 조정에 들어가서는 항상 바름과 꿋꿋함으로 나라일을 처리하였으나, 간신들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명종 2년에 죽었다. 그후 현종 1년(1660년)에 호조판서에 증즉되었고, 문충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이 비가 서있는 곳에 바로 송구수 형제와 매제 성제원이 한방에서 서로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3현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비문은 증손인 송시열이 짓고, 김수증이 썼다.
비석 원문 : 三賢閭碑 三賢閭 維我黑巖府君墓文 慕齋金先生所撰也 稱道三賢事行 雖約 而蓋知其氣象規模也 其文刊行於金先生文集 擧世皆知之矣 當時 過其閭者 無不肅恭 曰此三賢所居也 故 有此名焉其居 實在漢師之盤松坊鍮店洞 今此淸州馬巖里者 府君歸老之所 衣履之藏而文忠公畢命之地也 成東洲夫人墓 ?在府君傍 西阜府君墓亦五里而近 三賢遺跡 蓋多在此 此名之稱 於此亦久矣 噫 三賢事行 固爀爀照人耳目而金?庵謹恭 亦府君側出女壻也 其以儒學見稱於野史者甚彬彬焉 諱邦祚 淸名直道爲世所宗 我先府君睡翁公 諱甲祚 從氏忠顯公諱時榮 樹立卓然 褒典輝煌 自後 豈當時 德星偏照於府君一家也耶 然其不入於三賢之數者 豈以其季輩差後故耶 自是以後 府君曾此閭益著顯於無窮矣 德厚者流光 豈不信哉 文忠公受 後命時 府君祠版 極有靈異 玆事 載在名則 有習靜公臣言行錄 昔余初受禍時亦然 其謂父子祖孫 幽明異塗者 誠不知天理者也 黑巖府君諱世民字貞夫 西阜府君諱龜壽 字耆? 文忠公諱麟壽 字眉? 成東洲諱悌元 字子敬 西阜以不卽所謂三賢 而寔黑巖府君之子與壻去 崇禎紀元後六十二季己巳六月日 西阜公曾孫 時烈 謹識 安東 金壽增 書

비 해석문 : 삼현여비(三賢閭碑) 우리 흑암부군(黑巖府君)의 묘문(墓文)은 모재(慕齋, 金安國의
호)
김선생이 지은 것으로, 삼현(三賢)의 사적을 칭도(稱道)함이 비록 간략하나 그 기상과 규모를 대개 짐작할 수 있다. 그 글은 김선생의 문집에 실려 온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다. 당시에 그 마을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공경하면서, ‘이곳은 세 어진이가 살던 곳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있게 되었다. 그 자리는 실로 한양(漢陽)의 반송방(盤松坊) 유점동(鍮店洞)에 있다.
지금 이곳청주(淸州)의 마암리(馬巖里)는 부군(府君)이 귀향하여 노년을 보내던 곳이고 무덤이 있는 곳이며, 문충공(文忠公, 宋麟壽의 시호)이 목숨을 마친 곳이다. 성동주(成東洲, 成悌元의 호)의 부인의 무덤이 부군의 무덤 곁에 있고, 서부부군(西阜府君)의 무덤도 5리 가까이에 있어, 삼현의 유적이 여기에 많이 남아있으므로 이 이름이 이곳에 일컬어진지도 역시 오래되었다. 아, 삼현의 사적이 진실로 사람의 이목(耳目)에 훤하게 빛남은 말할 것도 없고, 척암(惕庵) 김근공(金謹恭)도 부군의 측실(側室) 소생의 사이로서 유학(儒學)으로 야사(野史)에 매우 드러나게 칭도되었으니, 이 어찌 당시의 덕성(德星)이 편벽되게 부군의 집에만 비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삼현의 수(數)에 들지 못함은 연배(年輩)가 조금 뒤인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후에도 부군의 증손 습정공(習靜公) 휘(諱) 방조(邦祚)가 청명(淸名)과 직도(直道)로 세상 사람에게 존중되었고, 우리 선부군(先府君) 수옹공(睡翁公) 휘 갑조(甲祚)와 종씨(從氏) 충현공(忠顯公) 휘 시영(時榮)이 절의가 뛰어나서 포상(褒賞)의 은전이 빛났으므로, 그 후로 이 마을이 더욱 먼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덕이 두터운 자는 덕을 후세에 전한다는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문충공이 귀양을 가서 사사(賜死)의 명을 받을 때에 부군의 사판(祠版, 위패)에 매우 영이(靈異)한 일이 있어 이 일이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실려 있고, 지난날 내가 처음 화를 받을 때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른바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이 유명(幽明)의 길을 달리한다’는 말은 진실로 천리(天理)를 알지 못한 것이다. 흑암부군의 휘는 세량(世良), 자는 정부(貞夫)이고, 서부부군의 휘는 귀수(龜壽), 자는 기수(耆叟)이며, 문충공의 휘는 인수(麟壽), 자는 미수(眉叟)이고, 성동주의 휘는 제원(悌元), 자는 자경(子敬)이다.서부부군 이하가 이른바 삼현으로, 바로 흑암부군의 아들과 사위이다. 숭정(崇禎) 기원후 62년 기사(己巳) 6월 일에 서부공의 증손 시열(時烈)은 삼가 짓고, 안동(安東) 김수증(金壽增)이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