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생애·영정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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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문정공파(尤庵文正公派)의 파조인 시열(時烈)은 1607년(선조 40) 11월 12일에 경헌공(景獻公) 갑조(甲祚)와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선산곽씨(善山郭氏) 사이에 3남으로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忠淸北道 沃川郡 伊院面 九龍村) 외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이 성뢰(聖賚)이고 자가 영보(英甫)이며 호가 우암(尤庵), 우재(尤齋)이고 시호가 문정(文正)인 그는 조선 후기 동방의 대유학자로 우뚝 솟은인물이다.
26세까지 태어난 마을에서 살다가 뒤에 회덕의 소제동, 송촌동, 가양동 등지에 살았다.
8세때 친척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면서 뒷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쌓았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격몽요결(擊蒙要訣)』과『기묘록(己卯錄)』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 율곡(栗谷), 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한산이씨(韓山李氏) 도사(都事) 이덕사(李德泗)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에 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타계하자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뒷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師傅)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으로 낙향, 10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斥和) 및 재야(在野)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 進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고 불렀으므로 그는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기축봉사(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그를 포함한 이른바 산당(山黨) 일파는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忠州牧使)에 이어 이듬해에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 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대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贊善)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그해 9월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작이 서거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그는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고 1673년((현종 14)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그러나 그가 재야에 은거하고 있는 동안에도 선왕(先王)의 위광(威光)과 사림(士林)의 중망(重望) 때문에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 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罷職) 삭출(削黜)되었고, 1675년(숙종 1) 정월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長鬐), 그리고 거제(巨濟)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 兼 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1)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 김익훈(金益勳) 등 훈척(勳戚)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 사건에서 그는 사계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였으므로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1683년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 1월 숙의(淑儀) 장씨(張氏)가 아들2)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서인(西人)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 집권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 6월 8일에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官爵)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 정읍, 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이때부터 덕원, 화양동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賜額書院)만 37개소에 이르렀다.
그의 행적에 대하여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숙종 42)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56년(영조 32)에 영의정(領議政)의 증직이 내려졌으며, 문묘배향(文廟配享)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그 뒤 1778년(정조 2)에 효종묘정(孝宗廟廷)에 배향되었다.
그의 학통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그는 매우 보수적인 정통적인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또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사회 신분문제에 있어서, 그도 양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권은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우선 양민들에게만 지워졌던 군역(軍役)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들에게도 군포(軍布)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 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또 서북지방(西北地方)3) 인재의 등용과 서얼(庶孼)의 허통을 주장하고 양반 부녀자들의 개가(改嫁)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정책은 양민들의 생활안정이었는데 이를 위하여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고, 그 자신이 빈민의 구제를 위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는데, 문장은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의 문체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의리(義理)를 기조로 하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고,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시(詩), 부(賦), 책(策), 서(序), 발(跋), 소차(疏箚), 묘문(墓文) 등 모든 글에 능했다.
서체(書體)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이 넘치는 것으로 평판을 받고있다.그는 학문과 정계에서 차지한 위치와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많았으며, 방대한 저술도 남겼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등 수없이 많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처음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우암집(尤庵集)』이라 하였고,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 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병선(秉璿), 병기(秉夔) 등에 의하여『송자습유(宋子拾遺)』1권이 간행되었다.수명(受命) 후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신리(京畿道 華城郡 東灘面 新里)인 옛 수원 만의(水原 萬義) 무봉산(舞鳳山) 미향(未向)의 자리에 안장하였다가 68년 뒤인 1757년(영조 33)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응봉산(鷹峰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묘소 입구에는 어제어필 전면대자(御製御筆 前面大字)가 새겨진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 : 사적 제417호)는 전면대자는 정조께서 쓰시고, 음기는 안진경 글씨를 집자하여 1779(정조 3)년에 세워졌다. 묘지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가 짓고 묘표(墓表)는 문인(門人)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짓고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이 쓰고, 묘표 추기는 송무원이 써서 1735(영조 11)년에 세웠다.이 비 우측에 5대손 환기(煥箕)가 추기(追記)하고, 6대손 치규(穉圭)가 쓴 비가 1804(순조 4)년에 세워졌다.
관련 유물로는 많은 어제문자(御製文字)와 사제문(賜祭文)으로 임금이 직접 지은 8편을 포함한 28점, 선기옥형 , 책상, 지팡이, 묵패 등이 있고, 유적으로는 구룡촌 고택 및 유허비, 소제 고택과 남간정사, 황간 냉천 월유봉 일대 유적 및 송동옛터 및 도봉서원, 화양동 계곡의 유적 이외에 포항, 장기, 거제, 제주, 정읍 등 적거지(謫居地), 그리고 여주 대로사(大老祠), 숭현서원(崇賢書院) 등 서원이 수없이 많다.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는 도사(都事) 증참판(贈參判) 덕사(德泗)의 따님으로 1606년(선조 39)10월 29일에 태어나 1677년(숙종 3) 3월 19일에 타계하여 부군과 합폄되었다. 슬하에는
안동인(安東人) 권시(權諰)의 아들 현감(縣監) 유(惟)와 파평인(坡平人) 윤문거(尹文擧)의 이들 박(搏)에게 출가한 2녀가 있고, 여흥인(驪興人) 민주경(閔周鏡)에게 출가한 다른 딸이 있다.
아들이 없어 우봉공(牛峰公) 응광(應光)의 자제 희조(熙祚) 앞으로 양자를 간 종형(從兄) 시형(時瑩)의 아들 기태(基泰)를 양자하였으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기태(基泰)는 촌수로는 재종질(再從姪)이지만 생가로는 큰아버지의 둘째아들 시형(時瑩)의 아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당질을 양자한 셈이다. 그에 대한 설화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전한다. 그 중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암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들
1. 옛날 어떤 과부가 남편을 여의고 충청도 목천(木川) 땅에 여인숙을 하고 사는데 그가 이인(異人)이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송우암의 부친(수옹)이 서울에 가서 벼슬을 하려고 몇 달을 계셔도 과거에 합격도 못하고 오랫동안 객지에서 머물고 있다 보니 고향이 궁금해서 옥천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분이 내려오는 길에 목천에 와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여인숙 주인댁이 참으로 반갑게 맞이하고 음식도 맛있게 대접해 주고 저녁이 되니까 자기하고 함께 자자[同寢]고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우암의 부친은 그 청을 거절했다.
“내가 그 동안 객지에 오래 머물러서 비록 객고는 심하지만 내 아내가 고향에 있어 그 고향에 가는 길인데 중간에서 다른 여자한테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그러니 네 청을 들어줄 수가 없어 미안하구나!” 주인 여자의 간청을 이렇게 거절하고는 이튿날 자기 집에 가서 자기 부인하고 관계를 하고 나서 다시 목천으로 올라왔다. 그 전날 여인숙 주인 여자가 그렇게 간청을 하고 달려드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서였다. 그래서 다시 그 여인숙으로 들어가니 그 집 주인 여자한테 이번에는 우암의 부친이 거꾸로 간청을 했다.
“어저께 당신이 그렇게 간청을 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는데, 오늘 저녁에는 내가 오히려 부탁하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오.” 그러니까 이번에는 거꾸로 그 여자가 간곡히
사절을 하였다. 우암의 부친이 이상히 생각하고“여보! 주인 마누라, 엊그제 저녁에는 (웃으면서) 그렇게 간청을 하더니 오늘은 왜 사절을 하오?”하고 물으니 그 여인숙 주인 여자는 자기가 이인(異人)이란 이야기를 하고서 “내가 관상을 보니까 그날 저녁에 당신하고 동침을 했으면 명현(名賢)을 낳을 수 있어서 그랬지요.
그러면 나도 명현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욕심으로 그랬는데 이제 당신이 본부인한테 가서 자고 왔으니, 이 다음에 아들을 낳더라도 내 자식은 명현(名賢)이 안될 거라서……”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암의 부친은 그 여자한테 거절을 당했다. 그래 그 양반이 그 여자 얘기를듣고서 과연 그 여자 말대로 참 아들은 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집 주인 여자의 청을 거절한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고향에 우암의 부친이 돌아와 주무신 그날부터 부인은 잉태가 되어 열 달 만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를 낳을 때 옥천의 적등강(赤登江) 물이 사흘을 말랐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강물이 마를 수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그만큼 대인은 산천의 정기를 타고 난다고 한다.
충북 청원군 미원면 미원리 김경태 구술 : 민족문화대계
2. 우암의 어머니 곽씨가 우암을 잉태할 때 태몽을 꾸었는데 그 꿈에 월이산(月伊山)이 몽땅 입안으로 들어와 그 산을 꿀꺽 삼켜버리는 꿈을 꾼 일이 있었다 하여 처음 잉태한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예측케 하였다.그리고 또 우암이 출생하던 바로 그 시각에는 월이산이 웅장한 소리를 내고 금강물의 빛깔이 잠시 변했다고 한다. 또한 우암이 출생할 때는 적등강(속칭 접둥강)의 물과 달이산(월이산4))의 풀이 사흘 동안 말랐다고 한다.
내고장 전통 가꾸기(옥천군), 한국구비문학전집(일조각)
우암의 가난한 소년시절의 이야기
1. 우암이 출생한 곳은 구룡촌인데 그 당시는 곽씨, 즉 송 우암의 외가가 그 마을의 모든 빛을 점하고 있던 때였다. 우암은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자랐는데 많은 구박을 받았다. 외가를 떠날 때 굉장히 우니까 외가에서는 하는 말이“외손자는 방앗고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암이 밥도 안 먹고 그 집을 떠나니 삽짝 바깥이 밤인데도 훤하니 밝아졌다. 그 뒤 우암이 이름을 떨쳤을 때 외가를 절단하였다.
한국구비문학전집(일조각)
2. 워낙 집이 가난하여 빨가벗고 다녔고, 굶기를 자주 했다. 그런데 이웃에 있는 외가집은 부자였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음식을 먹으러 오라고 해서 동지섣달에 빨가벗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외할아버지와 손님이 이야기를 하는데 들어가니 손님이“저 애는 누구요?”하니“얻어먹는 아이요.”하고 대답하자, 그 다섯 살짜리 우암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는데, 어린 아이가 그냥 가는 것이 안쓰러워 외할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아무것아! 저 놈이 내가 얻어먹는 놈이라고 했더니 그냥 갔는데 네가 가서 불러오너라.” 하니 외삼촌이 가서 데려 올라고 했으나 강을 건너는데 하늘에서 “송대감 가신다. 물 멈춰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물이 흐름을 멈췄다가 우암이 건너고 난 뒤에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우암이 이런 일이 있은 후 곽씨네 집에 앙심을 품고 곽씨네 산소를 둘러보니 못이 있었는데 이 못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못 옆에다 “이 못에 돌을 던지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 라고 써 붙여 놓았더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돌을 던져 못이 메워졌다. 이 때부터 곽씨는 못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구비문학전집(일조각)
3. 우암의 아버지 수옹이 가난하여 처가살이를 할 때의 이야기다. 처가에서 우암을 낳은 수옹은 그곳에 머물 무렵 처가댁 어는 집안의 제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사를 지낸 뒤 음복을 하다가 어린 우암이 생각이 나서 도포 자락에 몇 알의 과일을 넣었는데 그 광경을 본 처갓집 사람들이 여러 사람 앞에서 면박을 주었다.수옹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는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끼니때가 되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이에 식구들이 그 연고를 물어보니 마지못해 그 사연을 이야기 하니 옆에서 밥을 먹으며 듣고 있던 우암이 무슨 결심을 한 듯 그 자리에서 수저를 잘끈 물었다. 그랬는데 수저가 두 동강이 났다고 한다. 그 뒤 우암은 외가에 가지 않았으며 큰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외가의 선산곽씨는 일체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옥천의 곽씨가문 구전
사람을 위압하는 우암의 안채(眼彩)
1. 우암은 평소에 남과 대담을 할 때는 상대방이 겨우 들릴까 말까하는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했으며 눈은 항상 아래로 내려 뜨고 남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그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항상 눈을 아래로 내려 뜨는 이유는 남달리 부끄러움을 타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기상이 절륜하여 목소리는 천하를 호령할만큼 우렁찼고, 성격은 호방한데다가 담력이 세고 얼굴의 모습은 험상궂은 호랑이 상[虎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처럼 행동을 한 것은 만약 제대로 목소리를 내어 대화를 한다면 상대방이 위압되어 말문이 막히고 눈을 바로 뜨면 눈빛이 너무 세서 상대방이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마저 한 번도 스승을 똑바로 쳐다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 우암이 남달리 아끼고 가까이 한 사람 중 하나가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였다고 한다. 죽천은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작은 자제이자 인경왕후(仁敬王后)와 남매간이며 또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조카로서 당대의 석학이자 명필이며 그림에도 남달리 조에가 깊었던 것이다. 죽천은 평생에 한 번 우암의 영정을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우암이 눈을 똑바로 뜨는 모습을 보지 않는 한 영정을 그릴 수가 없어 고심했지만, 우암은 좀처럼 눈을 바로 뜨지 않아 덧없이 세월만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암에게 볼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댁을 방문하였더니 그 때 우암은 반색을 하며 “죽천이 왔어?”하고 비로소 눈을 바로 뜨는 것이었다. 죽천은 바로 이 단 한 번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 뒤 우암의 영정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전하는 몇 종류의 영정 중 하나가 죽천이 그린 것인데 그 밑그림인 영초(影草) 두 점 중 하나가 또한 죽천이 그린 것이다.
서울 진관동 김택중 씨 구술
2. 우암이 세자를 가르칠 때 눈을 크게 뜨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가 답답해서 “눈을 떠라!”고 재촉하였더니 우암이 “신(臣)이 눈을 크게 뜨면 세자께서 놀래십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세자가 더욱 재촉하므로 마지못하여 우암이 눈을 크게 뜨니 두 줄기 섬광을 뿜는 호안(虎眼)이라 세자가 그것을 보고 기절하였다고 한다.
한국구비문학전집(일조각)
3. 우암이 밤에 책을 읽을 때 등잔불을 켜지 않고도 책을 읽었다. 그래서 하루는 봉림대군이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어 우암이 있는 곳으로 가니까 어두운데서 책을 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사부께서 어두운데도 글씨가 보입니까?”하고 물으니 “예”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대군은 부왕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왕은 “우암은 이인(異人)이다. 나중에 큰일을 할 때는 반드시 우암과 상의하면 틀림이 없을것이다.” 라고 해서 뒤에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 하고서 우암을 늘 가까이 두고 국사를 논했다고 한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금동, 송재충
우암의 초인적 기상
우암은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세며 얼굴이 호상(虎相)이라 그가 한 번 호령을 하면 천하가 쩌렁 쩌렁 울리고 그 힘찬 기상 앞에서는 모두 기가 눌려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짐승들마저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하루는 우암이 산길을 가다가 뒤가 마려워서 잠시 산등성이 으슥한 곳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호랑이는 배가 고파 온 산속을 헤매는 참이었는데 마침 웬 사람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호랑이는 내심으로 기뻐하며 살금살금 뒤로 다가가서 단번에 덮칠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던 우암은 호랑이가 가까이 바싹 다가오는 순간 벽력같은 소리를 냅다 지르니 그만 호랑이는 놀라서 주춤하였다. 그리고 우암의 얼굴을 보자 그 기상에 눌려 막 뒤돌아 도망치려고 하였다.
그 순간 우암은 이미 잽싸게 호랑이의 꼬리를 지긋이 밟고 있었기 때문에 꼬리를 밟힌 호랑이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서 꼬리를 뽑아 달아나려 했지만, 그 때마다 우암의 발바닥만 들썩했을 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성주탁 교수 구술
내 자리를 이을 줄 알았더니 겨우 판서냐?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은 탄옹(炭翁) 권시의 손자이자, 우암의 외손자로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숯뱅이(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에서 자랐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아홉 살 때,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물 건너 회덕 땅의 외가댁에 갔다. 모처럼 만의 나들이인지라 외가댁의 반김 속에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먹자, 그는 이내 외할아버지가 기거하시는 사랑방 아랫목에서 살포시 잠이 들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 방에는 가까운 마을 선비들이 모여 앉아 학문과 도덕과 시국담으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런데 그 때 정국은 마침 노소남북의 사색당(四色黨)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때인지라, 자연히 화제가 그쪽으로 기울어 결국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심한 소리도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우암은 좌중을 진정시키면서 “그 같이 듣기 거북한 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옳아!” 하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좌중의 한 사람이 “왜 갑자기 우리의 화제를 막는 거요?” 하며 되물었다.그러자 우암은 아랫목에서 자는 외손자를 가리키며 “저 애가 들으면 나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했다.
비록 잠결이나마 어렴풋이 이 소리를 들은 유회당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면서“외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말씀이 오히려 더 나쁩니다. 굳이 어린아이가 들었으면 그만이지, 그것이 뭐가 그리도 큰 죄가 됩니까? 왜 조손간(祖孫間)에 사이를 두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말하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가서 어머니께 집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모처럼 만에 친정나들이(근친)를 한 어머니는 이 철없는 아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이 밤중에 근 10여 리나 되는 집으로 어떻게 간단 말이냐? 네 진정 집에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려무나!” 하고 오히려 꾸중을 하였다. 그랬더니 어린 유회당은 “그러면 저 혼자 갑니다.” 하고 홀로 어두운 밤길을 떠났다.이때 우암은 외손자의 담력을 시험해 보려고 종을 불러 멀찍이 미행을 시켰다.
유회당이 오물[梧井 :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오정동]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도깨비불이 나타나 “여기 권 판서 가신다.” 하고 소리치며 길을 안내하고 집 근처까지 와서는 도깨비가 없어졌다.미행했던 종이 돌아와 우암에게 이 사실을 고한즉 우암은 그 종의 이야기를 듣고 “저 아이가 내 자리를 이을 줄 알았더니 겨우 판서냐?” 하고 탄식 했다고 한다. 이만큼 우암은 유회당의 장래에 큰 기대를 걸고 무척 아꼈는데 그날 밤의 옹졸한 행위와 도깨비의 소리에 실망이 컸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 뒤 유회당은 도깨비의 예언대로 벼슬이 호조판서에 그치고 말았다.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권영원 구술
우암문정공시열묘표
공자가 주(周)나라 말엽에 탄생하니 당시 제후들이 방자하여 난동을 부리는 신하와 모역하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공자가 춘추(春秋)5)를 지어서 만세에 걸쳐 신하로서 지켜야 할 법을 엄격히 하였고, 주자가 송(宋)의 말기에 탄생하니 그 당시 오랑캐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남쪽에 가 있던 두 황제(徽宗, 欽宗)가 북으로 옮겨감을 당했으므로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 세상에서 오랑캐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의리를 밝혔고, 또 선생의 탄강이 명의 말년을 당하여 천지가 뒤집히고, 사해의 풍진이 피비린내가 났으니 선생이 왕의 주모를 도와 비괘(否卦)6)를 경복(傾覆)7)하고 둔괘(屯卦)8)를 극복함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았다.
대개 하늘도 기(氣)의 운수에 핍박당하면 한 번은 다스려지고 한 번은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어지러울 때에는 반드시 성인과 현인을 낳아서 큰 강령과 큰 법을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니 아! 하늘이 후세를 염려하여 주는 것이 지극히 깊고 절실하다. 어찌 우연히 그렇겠는가.선생의 이름은 시열(時烈)이고 자는 영보(英甫)다. 수옹공(睡翁公)의 제3자로 만력 정미(萬曆 丁未 1607) 11월 12일에 탄강하였다. 탄강할 때 수옹공 꿈에 공자가 그의 집에 왔으므로 심상치 않게 생각하고 소시의 자를 성뢰(聖賚)9)라고 하였다. 일찍이 총망하고 권면하여 말하기를“주자는 뒤의 공자고 율곡(栗谷)은 뒤의 주자니 주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미 어린 때로부터 이 교훈을 받고 성현의 학문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았다. 사계 선생(沙溪 先生)을 사사하자 율곡에서 전해진 바를 다 전수받고, 또 전적으로 주자서(朱子書)를 읽어서 정통을 삼았다. 학문에 공을 들이는 점은 사물을 철저히 연구하여 지식을 얻어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천성을 닦아서 그것을 실천하고 확충하는 데 있었다.그렇게 하여 지경(持敬)의 태도를 지니면 시종이 통관되기 때문에 지식과 실천이 병행되며 표면과 내면이 하나가 되었다.
도가 완성되고 덕이 높아졌을 때에는 정밀하고 순수하고 완숙되어 혼연하고 수연(粹然)한 경지였다. 또 일찍이 천지가 만물을 낳는 근본과 성인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근본이 다‘직(直)’뿐이니 공자, 맹자 이래로 전하여 내려온 것도 오직‘직(直)’자뿐이라고 하여 이것을 종신토록 간직하고 행하는 목표로 삼았다.이러한 까닭으로 선생의 동정과 언행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 보고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 학문에 관한 대략이다. 인조 계유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 급제하여 경릉 참봉(敬陵 參奉)10)에 임명되었고 이어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었으니 즉 효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였다. 제우(際遇)11)의 융성함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하였다.병자에 남한(南漢)까지 왕가를 모시고 따라 갔었으나 강화 조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곡하고 성을 나와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분수대로 산골짜기에서 생을 마치려 하였다. 두 번이나 지평(持平)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하여 장차 대의를 천하에 펴려 하여 장령으로 명소(命召)하고 또 고명(誥命)12)에 청(淸)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선생이 감격하여 들어가서 사은하고 연거푸 진선(進善)과 집의(執義)를 제수 받았다. 그때 청음(淸陰), 신독재(愼獨齋), 동춘(同春)의 여러 선생이 선생과 같이 조정에 있었다. 백성들이 모두 좋은 정치를 기대하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적신(賊臣)13)이 나라의 사정을 몰래 누설하여 청의 공갈이 날로 위급하였다. 그래서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또 승지, 찬선, 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다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에 위에서 혁연히 용기를 내어 비밀 편지로 선생을 명소하였다. 이에 선생도 드디어 왕을 위하여 진력할 뜻을 굳혔다. 무술에 예조 참판(禮曹 參判)으로 입조하니 판서로 승진시켜서 전국을 들어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지기가 상합하여 한 마음이 되고 경륜이 밀접히 이루어지니 세상에서 소열(昭烈)과 공명(孔明)의 관계로 비유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늘이 화를 내림을 뉘우치지 않아서 효종이 승하하니 일이 다 와해(瓦解)로 돌아갔다. 다시는 세상에 나설 뜻이 없어서 능침의 역사가 끝나자, 드디어 사복 차림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30년간 양조에서 예로서 대우함이 높아서 누차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제수 받았고 세 번이나 내각에 들어가 우의정과 좌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선생의 뜻은 단단하여 돌과 같았다(左右相을 통하여 조정에서 선 일수(日數)가 47일이다.).
국가에 일이 있어서 부득이하여 조정에 서더라도 오래 머문 일이 없었다. 현종 조 무신년과 금상(今上:肅宗)의 계해년에 이르러서는 왕의 뜻이 선왕 효종의 옛 정치 이념을 구현해보고자 하므로 일을 행할 만한 희망이 없지는 않았으나 시속배가 시기하고 소인들이 방해하므로 어쩔 수 없이 소매에 손을 끼고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 어찌 천운이 아닌가? 그러나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복위와 태조의 휘호(徽號)14)와 효종의 세실(世室)15) 문제 등은 다 선생에서 나왔으니 하늘의 떳떳함이 이에 힘입어 어둡지 않아 다 그대로 실현되었으니 천고의 큰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 진퇴의 대략이다. 선생이 효종의 세도를 바로잡는 부탁을 받고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으며 이단을 물리치고 바른 학문[正學]을 붙드는 것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겨 일찍이 말하였다. “이 유교의 정도(正道)로 하여금 나의 힘으로 세상에 밝게 할 수 있다면 멸망하고 죽는일이 있더라도 아무런 한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윤휴(尹鑴)가 일찍이 주자를 능멸하여 중용장구(中庸章句)를 고친 데 대하여 극력 배격하여“이것은 사문(斯文:유교)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 만약 휴를 도와서 이러니저러니 하는 자는 춘추의 법에‘난동을 피우는 신하와 모역하는 무리는 먼저 그 부동하는 자부터 다스리라.’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휴의 무리가 밤낮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다가 갑인에 예론이 나오자 이에 가탁하여 화를 얽어서 드디어 북쪽으로 귀양살이 보내고 남쪽으로 위리 안치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그리하여 제주도에 유수(幽囚)하게 되어서는 화색이 더욱 위급하게 되었지만 선생이 태연히 변동하지 않고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뜻이 뚜렷하였다. 경신에 석방되어 돌아오자 또 세도가 크게 변하여 문인 윤증(尹拯)이 그의 부친이 일찍이 휴(鑴)에 가담하다가 선생에게 배격 당하였으므로 협감을 가진 지 오래여서 방자한 뜻으로 기회를 만들어 오다가 휴의 당이 다시 일어나매 해기(駭機)가 교차되어 선동하여 드디어 기사년의 참화를 일으켰다.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기를“주자 뒤에는 의리가 구비되어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학들은 마땅히 주자를 존신하여 뜻을 다하여 강구하여 밝히면 성인이 되거나 또는 현인이 되는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반드시 저서를 하여 후세에 보이려고 하는 것은 망령된 일이며 혹붙이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공을 들인 것은 모두 정자와 주자의 뜻을 천명하여 비록 유배되고 이배되어 위험하고 곤궁한 가운데라도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여 밝히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두지 않고 한 마디의 말과 한 마디의 구절이라도 명백히 해 놓지 않은 것이 없으니 초학의 선비라도 능히 그 의미를 알도록 만들어 놓았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義)』와『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는 장기(長 )에 있을 때 편찬한 것이고『어류소분(語類小分)』은 거제도에 있을 때 편찬한 것이고,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惑門精義通考)』는 제주도에 있을 때 이룬 것이다. 『심경석의(心經釋義)』는 이퇴계(李退溪)가 강론한 것인데 명에 의하여 첨가도 하고 삭제도 한 것이다. 또 문집(文集) 100여 권이 있으니 장차 세상에 퍼질 것이다.은진송씨는 고려 판원사(判院事) 대원(大原)이 시조다. 이조에 들어와서 쌍청당(雙淸堂) 유(愉)가 태종 때를 당하여 회덕에 퇴거하였다. 증조 귀수(龜壽)는 벼슬이 봉사인데 판서(判書)를 증직 받았고 호는 서부(西阜)다. 효성이 지극하여 거상할 때 흰 제비가 와서 깃들이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조부 응기(應期)는 도사로서 증직이 찬성(贊成)이다.
고(考) 수옹공(睡翁公)은 봉사(奉事)로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 받았다. 대절이 탁연하여 효종의 포전(褒典)을 받았다. 비(妣) 곽씨(郭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증 받았으니 그의 부친은 충신(忠臣) 자방(自防)이다.선생의 배위는 한산이씨니 도사(都事) 덕사(德泗)의 따님이다. 수원 무봉산(水原 舞鳳山) 미향의 자리에 선생과 합폄하였다. 계자 기태(基泰)는 벼슬이 도정(都正)이다. 두 따님은 각각 현감(縣監) 권 (權惟)와 사인(士人) 윤박(尹搏)에게 출가하였다. 또 따님 하나는 민주경(閔周鏡)의 처가 되었다.장손 은석(殷錫)은 현감이고, 제2손 주석(疇錫)은 교리(校理)고, 제3손 무석(茂錫)은 군수이고, 제4손 순석(淳錫)은 현감이고, 제5손 회석(晦錫)은 조졸하였다. 손녀는 최성서(崔星瑞)에게 출가하였다.
외손 중에서 이정(以鋌), 이개(以鍇), 부사 이진(以鎭)은 권씨 소생이고, 은교(殷敎), 주교(周敎)는 윤씨 소생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마침 증손 일원(一源)이 학행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선생이 제2손 주석(疇錫)이 가정의 학문을 잘 이어 받았으므로 항상 애지중지하여 후사를 촉부하였다. 또 묘전에는 큰 비를 세우지 말고 상하(尙夏:遂庵 자신)에게 몇 줄 조그만 표에 써달라고 하여 후세 사람이 알아보도록 하면 된다고 하였다. 너무 장대한 것을 싫어함이다. 아! 선생의 사실을 기록하려면 100척의 비인들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또 묘당의 대업은 국사에 명백히 적혀 있고, 가정에 있어서의 지극한 행실은 세상의 표준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다 그 법을 본받아서 무궁하게 전할 터이니 다만 그 개략만을 따서 위와 같이 논찬한다.
아! 율곡은 앞에서 지었고 선생은 뒤에서 이어받아 우리의 동방 도학의 전통을 열었으니 하늘의 정기가 동방으로 건너와서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주자의 도가 율곡에 이르러 다시 밝아졌고 율곡의 사업이 선생에 이르러 더욱 넓어졌다. 율곡은 하늘이 열려서 태양이 밝은 것과 같고 선생은 땅이 받치고 있어 바다가 잠긴 것과 같다. 세상의 덕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명에가로되
의리는 춘추를 잡았고 학문은 무이(武夷)를 전했도다.
뭇 유사(儒士)를 집대성하였으니 백세의 스승이 되었도다.
문인 권상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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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1) 봉조하(奉朝賀) : 조선시대 전직 관원들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 종신토록 신분에 맞게 녹봉을 받았으나 실무는 보지 않고 의식에만 참여함.
2) 아들 : 뒤의 경종(景宗).
3) 서북지방(西北地方) :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
4) 월이산 : 일명 달이산이라고 하는데 우암이 출생한 바로 앞 강물인 적등강 가에 있는 산.
5) 춘추(春秋) : 노나라 역사.
6) 비괘(否卦) : 곤하건상(坤下乾上)의 군자(君子)에게 불리한 괘.
7) 경복(傾覆) : 뒤집다.
8) 둔괘(屯卦) : 진하감상(震下坎上)의 물건이 처음 생하여 아직 통하지 않고 어려움이 있는 괘.
9) 성뢰(聖賚) : 성인(聖人)이 준다는 뜻.
10) 경릉 참봉(敬陵 參奉) : 덕종(德宗)의 릉 참봉.
11) 제우(際遇) : 군신 간에 뜻이 맞음.
12) 고명(誥命) : 사령장. 고신(告身).
13) 적신(賊臣) : 김자점(金自點) 일파를 말함.
14) 휘호(徽號) : 왕 또는 왕비가 승하한 뒤에 시호와 같이 올리는 존호(尊號).
15) 세실(世室) : 불천지위.






